고통을 연민으로 (사53:2~6) / 김재홍 목사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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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의 바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어느덧 사순절 순례의 마지막 주일인 종려주일, 고난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인 사순절을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 또한 여러 고난을 겪었습니다. 계엄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계엄 이후의 상황 또한 온 국민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분열되어 있는 사회임을 아프게 인식해야 했습니다. 헌재의 결정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었습니다만 계엄 이후 발생한 여러 문제와 갈등이 해결될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 예상됩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역대 가장 큰 피해의 산불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사상자도 가장 많았고, 피해 규모도 가장 컸습니다. 검게 타버린 산림이 다시 녹화되기까지는 최소 30년이 걸리고 사라진 생태계가 복원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번 화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다시 힘을 얻기까지, 부상당한 이들이 다시 회복하기까지, 집이 무너진 이들이 다시 집을 세울 수 있을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나라의 화합과 회복을 위해 믿음의 사람들과 온 국민이 더욱 힘을 모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미얀마에서도 큰 지진으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사망자는 3,000여 명 부상자는 5,000여 명에 이르고, 도로 주택 빌딩 등이 무너져 사람들이 길 위에서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전기, 통신, 식수도 끊겼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라도 빨리 구조해야 하는 이 긴급한 상황 속에서도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군사정부는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진피해 현장에 군인력을 동원해도 모자른 판국에 반군을 공격한다며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로인해 구호활동가와 의료진들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보내고 있는 구호물품을 군부가 장악하고 있어서 지진피해 현장까지 전달이 잘 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순절 내내 마음을 쓴 곳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였습니다. 휴전을 파기하고 약 3주만에 가자지구에서는 1,450명이 죽고 1,000명이 넘는 어린이가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안토니우 쿠테흐스 유엔총장은 지금의 가자지구는 킬링필드-죽음의 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죽음과 고통의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인생은 고해, 고통의 바다라는 말이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인간 사이의 갈등, 자연재해, 전쟁, 그리고 또 한 개인이 겪어내야 하는 질병과 같은 고통까지 고통은 바다 같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 인간은 고통의 바다를 힘겹게 헤엄치는 작은 한 마리의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스라엘의 북부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마지막 순례는 유월절 예루살렘 입성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유월절 명절을 맞아 이곳저곳에서 예루살렘 성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은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갈 때였습니다. 로마는 무거운 세금과 군역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AD 6년에는 갈릴리 지역 세포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로마는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세포리스로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 2,000개의 십자가를 세워 2,000명의 사람들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런 착취와 고통의 시간이 쌓여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과 메시아 등장에 대한 소망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만 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일반 순례자처럼 입성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메시아로 여기던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시려는 듯 예루살렘 성에 특별하게 입성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빌려온 나귀에 올라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주전 6세기, 예루살렘 성전재건에 힘을 보태었던 예언자 스가랴는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자, 메시아로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고, 유대 사람들을 구원자,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입성을 축하했습니다.
주전 141년 유다 마카비 가문의 시몬은 오랫동안 유다를 식민지배하고 있던 셀레우코스의 군대와 요새를 무너뜨리고 유다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비파와 수금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마카비 시몬의 입성을 축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때의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며, 그와 같은 일이 다시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카비 시몬의 입성 때처럼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은 맞지만, 그 구원은 유대인들이 바라던 구원과는 다른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따르는 무리가 구름떼처럼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로마에 무장 저항을 하던 열심당의 당원도 있었습니다. 그 구름떼 같은 사람들과 열심당원과 함께 힘을 합친다면 예수님도 마카비 시몬처럼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을 몰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그 길이 아니었습니다.
3. 고난 받는 종의 노래
주전 6세기 남유다는 바벨론이라는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나라의 멸망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졌고,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적국에 포로로 끌려가 산다는 것은 수치스러우면서도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포로 대부분은 귀족, 제사장 등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층인사들이었습니다. 신분의 급격한 하락 또한 그들이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겁니다. 지도층 인사였는데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어 채찍을 맞으며 고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갑자기 찾아든 버림받음, 모욕, 추락, 고통과 아픔을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야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던 시기에 이사야의 이름으로 선포된 말씀은 이사야서 40장에서 55장까지의 말씀입니다. 학자들은 이 이사야를 제2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제2이사야는 고된 노예살이의 고통 속에 있는 유대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였습니다. 제2이사야서의 백미는 52:13~ 53:12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볼품없어 보였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은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은 것이고 다른 이가 겪어야 하는 슬픔을 대신 겪은 것이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양처럼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잠잠한 양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중재에 나선 것이다.’
‘고난 받는 종’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서술 하나 하나가 예수님의 생애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고난 받는 종’이 장차 등장할 메시아이거나 유대 민족 자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이 누구냐’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고난 받는 종을 통하여 어떤 일이 이루어지느냐’입니다. 고난 받는 종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매를 맞기도 했는데 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생명과 평화와 치유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53:11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고난 받는 종은 고난을 통해 지식을 얻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이 고난을 통해 얻은 지식은 어떤 지식이었을까요?
4. 고통을 연민으로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 보면 제우스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법을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난을 통해 배우라” 제우스의 그런 명령이 없었다 하더라도 인간은 고난과 고통을 통해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고난과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거기서 발생합니다. 고난과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고난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에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지 못해 고통스러워하자 이세벨은 왜 그런 일로 괴로워하느냐고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고통의 원인은 아합의 욕심에 있었는데 이세벨은 고통의 원인을 그 포도원을 주지 않는 나봇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이 아합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내면속에서 우리도 잘 모르는 ‘고통의 이기적인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통의 이기적인 법칙은 이것입니다. ‘나의 고통은 너의 고통보다 크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고통은 너의 고통보다 크다’는 법칙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내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해서 느끼는 고통은 나봇이 죽으며 느끼는 고통보다 큰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의 갈등의 뿌리에는 이 고통의 이기적인 법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받는 종이 고통을 통해 얻은 지식은 그 고통의 이기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지식이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이 고통을 통해 얻은 지식이 어떤 지식인지를 잘 드러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조쉬아 벤 레비라는 랍비가 예언자 엘리야를 만나 묻습니다. “메시아가 언제 오십니까?” 엘리야가 답합니다. “가서 그분에게 직접 물어보시게.” 레비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그분이 오셨습니까? 그분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성문에 앉아계시지.” 레비는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분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습니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그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계시지.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동여맨 붕대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한꺼번에 싸매지만, 그분은 한 번에 한군데씩 상처를 풀었다 다시 싸매시지.” “그러면서 그는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을 거야. 그럼 그때 지체 없이 그를 돕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해.’라고 혼잣말을 하고 계실 것이네.” 나도 아파보니 너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되고, 너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니 나의 아픔을 잠시 내려놓고 너의 아픔을 돌보려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지식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 고통을 통해 얻은 지식인 것입니다. 바로 그 실천적 연민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우리 모두가 고통을 통해 배워야 하는 마음인줄 믿습니다.
지진 피해를 입은 미얀마와 산불 피해를 입은 영덕에 있는 한 교회에 청파교회 이름으로 구호금을 보냈습니다. 도울 곳을 알아보던 중 경상도에서 목회하던 목사님이 영덕에 있는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작은 개척교회이지만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애쓰는 목회자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이고, 교회와 사택이 같이 있는 건물이 이번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했습니다. 목회실에서 그 교회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고, 피해 상황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획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소정의 구호금을 송금해 드렸습니다. 직접 가서 전해드렸어야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그러질 못했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에 그 교회 목사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청파교회에서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고, 깜짝 놀랐다고,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정말 큰 힘이 된다고, 바르고 좋은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그리고 청파교회 교우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과 고통에 매몰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고난과 고통을 다른 이에게 되갚아주거나 전가하려고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쉽지 않지만, 우리가 겪는 고난과 고통을 다른 이를 향한 연민의 동력을 삼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헤엄치는 한 마리의 물고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이 고통이 가득한 고해, 고통의 바다 같은 세상은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함께 기쁨으로 이루어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의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