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직장 큐티

십자가, 십자가!(마가복음 15:34-39) / 원용일 목사

새벽지기1 2025. 4. 18. 05:31

십자가, 십자가!
(마가복음 15:34-3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인간 세상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오로지 이 십자가만을 위해 달려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5:34-39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cross)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난(cross) 곳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에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진노를 다 쏟아 공의를 이루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죄 지은 모든 인간을 다 죽일 수 없으니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신 사랑의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곳입니다. 이 십자가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가의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았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도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죽음의 순간,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1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지성소가 열린 것입니다. 이 장면은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가장 축복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담이 사라졌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도망간 제자들 대신 누가 십자가 곁에 있었을까요? 십자가 형을 집행하던 백부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는 과정을 다 지켜본 후 신앙을 고백했습니다(39절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은 자신의 일을 하다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참 복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 더구나 사형집행과 같은 험하고 힘든 일을 하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뒤에서 섬겼고 죽으실 때 앞으로 나서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제자들은 다 어디 갔나요? 오늘도 교회 안에 성도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귀합니다.

모인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흩어진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열두 제자와는 달리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요 19:38). 숨은 제자였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용기가 생겨 빌라도에게 시신을 달라고 요구해 예수님을 장사 지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실컷 울고 마음껏 환호해야 합니다.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우리 주변에 백부장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를 소개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 가까이에 있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의 십자가뿐이게 하소서. 베드로처럼 장담했어도 결국 그리스도뿐이게 하소서. 제자들처럼 다 도망갔더라도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게 하소서. 우리 인생의 결론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게 인도해 주소서. (by 원용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