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하나님의 북소리 (암 7:10~17) / 김재홍 목사

새벽지기1 2025. 2. 24. 04:34

 

베델의 아마샤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알렸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나라 한가운데서 임금님께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은 칼에 찔려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사로잡혀서, 그 살던 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 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소. 이제 그대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오. 그대는 나더러 '이스라엘을 치는 예언을 하지 말고, 이삭의 집을 치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말하였소. 그대가 바로 그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네 아내는 이 도성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은 칼에 찔려 죽고, 네 땅은 남들이 측량하여 나누어 차지하고, 너는 사로잡혀 간 그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꼼짝없이 사로잡혀 제가 살던 땅에서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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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여 주여가 아니라 죽여 죽여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명인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올바른 신앙인은 말씀만 읽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시대를 읽으며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저도 매일 말씀을 공부하는 동시에 신문과 뉴스를 공부하듯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문과 방송을 보기가 좀 힘듭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개신교회가 자주 등장하는데 미담과 모범사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심각한데 교회가 그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한국 개신교회가 점점 극단적으로 우경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말씀보다 정치적 이념이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말씀은 경배와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 이념을 이루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타락입니다. 본인과 본인의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하고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를 악마화로 정죄하고 그를 향해 폭언을 쏟아냅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우연히 개신교회의 집회 현장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회의 이름을 내걸고 모인 길거리 집회에서 외치는 소리는 “주여 주여”가 아니라 “죽여 죽여”였습니다. 사회자가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아무개,라고 부르면 그때마다 회중이 “밟아 밟아”로 화답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뭘 들은 것이지?’ 싶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일반 시민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헌금이 걷히고, 찬송과 설교가 쩌렁쩌렁 울려퍼졌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말씀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증오와 혐오와 선동만 넘쳐날 뿐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 하나님 당신이 모욕을 당하고 계시는구나.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예언자가 등장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는데 그 예언이 하나님께 모욕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예언자와 싸우고 예언자가 제사장과 싸웁니다. 오늘은 그 중 두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2. 말씀과 선동


주전 8세기에 아모스 예언자와 아마샤 제사장이 충돌했습니다. 아모스는 본디 남유다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치던 농부이자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예언자로 삼으셨고 북이스라엘에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2세였는데, 그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왕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이겨 영토를 확장하였고, 큰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부자들은 겨울 별장, 여름 별장을 지었습니다. 값비싼 상아 침대에서 자고,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고, 가장 좋은 향유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부자들은 농부들에게서 곡물세를 과하게 거두어들였고, 가난한 사람을 신발 한 켤레 값에 사고 팔았습니다. 완전한 부익부 빈익빈이었습니다. 부자들은 그렇게 불의하고 부정의하게 살면서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과연 그런 제사를 좋아하셨을까요? 아모스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나는 그런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공의와 정의를 저버린 번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아모스는 여로보암2세와 북이스라엘 전체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여로보암2세가 칼에 찔려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사로잡혀서 살던 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여로보암2세는 그 누구보다 북이스라엘을 잘 다스리고 있었고, 북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번영과 안정을 이루었는데 왕이 죽임을 당하고 북이스라엘이 곧 멸망한다니요. 북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부유한 지배층에게 아모스의 예언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중심 성소인 베델 성소의 책임자였던 아마샤가 보았을 때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안정을 깨려는 선동꾼이었습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가서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며 왕실이오.” 무슨 말입니까? ‘선동꾼아, 여기서 썩 꺼져라’라는 말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모스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한낱 선동으로 치부했습니다.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모스의 예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로보암2세는 죽었고,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주전 722년에 멸망했습니다.

또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주전 6세기 예레미야 예언자와 하나냐 예언자도 충돌했습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유다를 다스릴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이미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공격해 유다의 왕 여고냐와 여러 지도자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고, 성전의 기물 또한 빼앗아 간 이후입니다. 유다의 주변 나라들,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의 사절들이 바벨론 대책회의를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목에 멍에를 여러 개 메고 그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는 나의 종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모든 민족을 맡겼다.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메지 않은 나라는 멸망당하게 하겠다.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 말하는 예언은 거짓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좀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고 유다의 왕을 사로잡아간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그의 멍에를 메라고? 그를 섬기지 말라는 예언이 거짓이라고? 저 말이 진정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일까? 저 말이 거짓말 아닐까?’ 그때 하나냐 예언자는 마치 예언 베틀을 하듯이 예레미야의 예언과는 정반대되는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렸다. 느부갓네살이 가져간 성전의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이곳으로 다시 가져오겠다. 그리고 여고냐와 다른 포로도 내가 이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내가 반드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겠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바로 응수했습니다. “아멘. 주님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나도 당신의 예언이 이루어지면 좋겠소. 그러나 예언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를 주님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오.” 뼈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거짓 예언자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냐는 화가 났는지, 예레미야에게 달려 들어 그의 목에 있던 나무 멍에를 빼앗아 꺾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이 년 안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모든 민족의 목에서 벗겨서 이와 같이 꺾어 버리겠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보다는 하나냐의 예언에 환호했을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하나냐의 말을 사이다처럼 시원한 말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냐의 말이 자기들의 바람과 욕망에 부합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유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고구마처럼 갑갑한 말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말이 자기들의 바람과 욕망에 반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이다 같은 말이 우리에게 독이 될 수도 있고, 고구마와 같은 말이 우리에게 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언자가 선포한다고 그게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시대를 읽고 말씀의 정신을 따라 선포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그릇된 바람과 욕망을 부추기만 할 뿐 시대도 읽지 못하고 말씀의 정신에서도 어긋나게 선포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동이며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안타깝게도 유다는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냐의 선동을 따랐다가 멸망했습니다. 우리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선동으로 받아들여도 망하고, 남유다 사람들처럼 선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망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선동을 잘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의 북소리


지난 주일인 2월 16일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윤동주 시인의 기일이었습니다. 1945년 2월 16일. 그러니까 해방을 6개월 앞둔 때, 민족의식에 빠져 독립의 야망을 이루려 망동했다는 죄목으로 일본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복역 중 27세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윤동주는 민족시인이기도 했지만 기독교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신앙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팔복’, ‘십자가’와 같이 제목에서부터 기독교 색이 짙은 시를 쓰기도 했지만, 그의 시 전반에는 기독교의 정서와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괴로워하는 마음, 자기의 욕망이 아니라 하늘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반성적 자세가 늘 그의 내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연약한 타자에 대한 연민 또한 늘 그의 내면에 있었습니다. ‘반성과 연민’ 그것이 윤동주 시의 바탕이며 윤동주라는 존재의 바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반성과 연민’이야말로 기독교의 정신이며 말씀의 정신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잘못을 돌아보지 못해서, 그리고 자기의 바람과 욕망에만 주목할 뿐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이의 아픔을 돌보지 못해서 망했습니다. 자기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다른 이를 착취하고 억압하고 연약한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저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망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입니다. 반성과 연민을 잃어버릴 때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교회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저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란 책을 오래간만에 다시 읽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읽는 것입니다. 줄을 긋고 마음에 새기는 문장들이 많습니다. 이미 암기하고 있던 문장이요, 많은 이가 자주 인용하는 문장이지만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 문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들과 보조를 맞추어 걷고 있지 않다면,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그 북소리를 따라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개신교인이 들어야 하는 북소리는 이념의 북소리도 아니요, 우리만의 번영과 안정의 북소리도 아니요, 그릇된 바람과 욕망의 북소리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북소리, 공의와 정의의 북소리, 반성과 연민의 북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곳곳에서 혐오와 증오의 북소리가 들려옵니다. 갈등과 분열의 북소리가 넘쳐납니다. ‘죽여라 밟으라’는 북소리가 크게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북소리를 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과 이해의 북소리, 화해와 일치의 북소리, ‘살리자 보듬자’라는 북소리를 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북소리에 이끌리어 살아가고, 생명과 평화의 북소리를 울리며 살아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의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