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의 하나님 (이사야서 57장) / 김영봉목사
해설:
1절부터 13절까지는 우상 숭배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의 말씀이다. 1절과 2절은 다가올 재앙에 대한 암울한 경고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때 이른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지만, 실은 다가올 재앙을 피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신 것이다.
주님은 의인들의 죽음을 보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점쟁이 자식들”이라고, “간통하는 자와 창녀의 씨들”(3절)이라고 부르신다. 그들은 우상을 찾아 산과 들로 찾아 다니고, 자식을 죽여 제물로 바치며, 집안에도 우상을 두고, 이방 신전에서 행해지던 집단 혼음에 참여한다(5-8절). “너희 집 문과 문설주 뒤에는 우상을 세워 놓았다”(8절)는 말은 신명기 6장 8-9절(“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써 붙여야 할 그 자리에 그들은 우상을 둔 것이다.
“몰렉”은 암몬 민족이 섬기던 신으로서 가나안 정착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섬기곤 했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섬길 우상을 찾아 먼 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도 한다(9절). 그들은 그것이 헛된 것인 줄 알면서도 우상에게서 힘을 얻었다고 스스로를 속인다(10절). 주님은 왜 그 우상들을 그토록 두려워하여 버리지 못하느냐고 질책하신다(11절). 주님께서는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실 것이며(12절) 당신께 피하여 온 사람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4절부터 21절은 유다 백성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포로된 백성이 돌아올 길을 준비하라고 명령 하신다(14절).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15절)이시다. 하지만 그분은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 오시어 “겸손한 사람”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15절)에게 가까이 오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질책하시지만 한없이 분을 품지는 않으신다. 그들이 끝까지 주님을 거역한다 해도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16-18절). 그 때 그들은 평화를 누릴 것이나, 악인들은 끝내 평화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19-21절).
묵상:
십자가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오셨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철저히 무력해지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는 우주의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요 1:1)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이미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성육신 사건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불멸의 존재로서 무덤까지 내려 오셨습니다. 절대 거룩의 하나님이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는” 분이며,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주는”(15절)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립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보통 “평화” 혹은 “평강”으로 번역됩니다. 이것은 분쟁과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제 자리를 잡고 제 기능을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 말로는 “평화”보다 “안녕”이라는 번역이 더 좋습니다. 진정한 “안녕”은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성삼위 하나님 안에 머물 때 회복되는 에덴의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 안녕의 상태를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