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입시를 위해 머리가 터지도록 쪼가리 지식을 저장하는 것도, 취업을 위해 전문지식을 터득하는 것도, 이익의 저장고를 선점하기 위해 발밭은 정보를 획득하는 것도, 세속의 교양을 주어 담는 것도 아니다. 쪼가리 지식이든, 전문 지식이든, 정보든, 교양이든 내 몸과 삶의 중심을 관통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것은 모짝 공부가 아니다. 철학자 김영민은 생각은 공부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생각이라면 장삼이사, 그 누구나의 것일 뿐 아니라 필부필부라면 오히려 멈출 수도 없을 지경으로 늘 과잉하지만, 공부는 그처럼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공부론. 39)고 말이다.
그렇다면 공부란 도대체 무엇일까? 공부란 단순한 지식 습득 너머에 있다. 이해(利害)와 욕망, 사회적인 인정까지도 닿지 않는, 그래서 다소간 비현실처럼 보이는 곳에 공부 본연의 자리가 있다. 화려한 성취보다는 소박한 삶의 온전함(구원)을 담아내는 것, 나를 알기 위해 너로 나아가는 것, 너를 통해 나를 살아내는 지난한 과정이 곧 공부다. 다시 말해 나를 형성하는 것, 지금의 나를 깨부수어 하나님의 형상을 조형하는 것이야말로 공부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무릇 공부란 내 몸과 삶의 중심을 관통해야 한다. 몸과 동떨어진 공부, 생활과 동떨어진 공부는 욕망의 몸짓일 뿐.
그런 면에서 이 시대는 공부가 실종된 시대다. 공부의 주체는 없고 공부의 욕망만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욕망에 영혼을 빼앗긴 공부 - 공부 아닌 공부만 범람하고 있다. 공부 아닌 공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이 시대의 일상은 온통 공부 아닌 공부로 충만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공부해야 생존할 수 있는 평생 교육시대 - 지식 경영 시대에 발맞추느라 내남없이 공부 아닌 공부에 골몰하고 있다.
이 시대는 가히 공부 아닌 공부 과잉 시대다. 과잉한 공부가 공부를 죽이는 시대 - 공부가 수박 겉핥기 · 속도 전쟁 · 기억 전쟁으로 내몰린 시대다. 공부에 찬란한 욕망이 결합하면서 공부가 삶을 북돋기보다는 되레 삶을 소외시키는 시대다. 공부에 짓눌려 스러져간 꽃들이 해마다 수백인 시대다.
하기야 영혼까지 실용화된 현대 사회에서 제대로 된 공부를 기대한다는 건 애당초 무리인지 모른다. 욕망을 자극하고 포장하는데 주력하는 자본주의 체계가 우리의 생활은 물론 정부 · 가정 · 대학까지 점령해버린 시대에 공부 아닌 공부가 제대로 된 공부를 집어 삼키는 것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사실이다. 시대가 그렇게 하고 있다. 공부 아닌 공부는 호출하지만 제대로 된 공부는 퇴출시키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그래서 공부 아닌 공부를 하는 자들은 많지만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자는 극히 드물다.
삶의 어리석음을 많이 겪어온 탓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공부에 목이 마르다. 공부하는 자들이 그립고, 공부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말과 생각과 몸을 섞으며 살고 싶어진다. 욕망이 공부를 추동하는 이 시대에 욕망 없는 공부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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